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술탄 마흐무드 (문단 편집) === 즉위 === 비슷한 시기인 997년, 8월 5일, 가즈니 왕조의 실질적인 건국자인 사부크티긴이 발흐에서 가즈니로 돌아오던 중 테르메즈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임종 시에 장남이었던 마흐무드를 제치고 차남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둘은 이복 형제였는데, 이스마일의 모친이 더 높은 계급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당시 마흐무드는 호라산의 지배자로서 니샤푸르에 있었는데, 이스마일은 그를 매우 경계하였고 즉위하자마자 숙부인 보르구즈와 자신의 친동생 누르 알 딘에게 호라산 총독 직위를 넘기라는 칙령을 니샤푸르로 보내었다. 이복동생의 즉위와 갑작스러운 해고.. 명령에 반발한 마흐무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마흐무드의 다른 동생인 아불 무자파르가 그의 진영에 합세한 것이 호재였다. 양측의 전투는 가즈나 인근에서 벌어졌다. (998년 3월) 전투는 길고 지지부진 하게 이어져 두 군대 모두 지쳐 갔는데, 이스마일 진영은 코끼리 부대가 있었고 마흐무드 측보다 수도 더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흐무드의 군대는 실전 경험은 그 열세를 극복하고 상대 진영을 와해시켜 놓는데 성공하였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스마일 측의 코끼리들이 전선을 이탈하여 중앙부에 틈이 생겼고, 기회를 잡은 마흐무드가 소수의 기병과 돌격하여 천막에서 지휘 중이던 이스마일을 생포하였다. 주군이 생포되자 이스마일 측의 병사들도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다. 마흐무드는 자신의 손으로 이스마일로부터 직접 왕관을 낚아채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 놓는 것으로 대관식을 대신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마흐무드는 쌍둥이 아들을 얻으며 즉위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한편, 패배 이후의 이스마일은 구즈간[*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한 탑에 유폐되어 여생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